돈화문 정문/보물 385호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년(태종12년)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궁궐로는 가장 오래된 궁굴이다
돈화문 안쪽에서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창덕궁은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됨
궐내 각사
궐내각사는
궁궐내에 근무하는 관원들이 근무하는 공간으로 정치을 관리하는-홍문관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정각
왕의 청렴과 교서를 보관하는 예문각
창덕궁은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진선문
창덕궁에는 궁 정문에서부터 정전에 이르는 추줄입선에 세갱의 문이 세워져 있다
세개의 문중에 돈화문은 가장 받깥쪽의 있는 창덕궁의 정문이고
다음 금천교를 지나 만나게 되는 진선문은 외행가 주출입문이고
마지막 인정문은 외행각주출입문이라 한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인정전/국보 225호
인정전은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인정전은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장식을 잘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희정당/보물 815호
임금의 편전이 딸린 편전이였는데 나중에 어진회의실로 사용 되었다
1917년 대화실로 전소 되었는데 1현재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연전을 옮겨 지는것이다
대조전은보물 816호
대조전은 왕비가 생활하던 중궁전의 건물이다
태종 5년(1405년)에 처음 지었으나 그후 여러차례 불에 탔다. 현재 건물은 1917년 불타서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다 다시 지은 것이다
대조전이라고 지은 이유는 임금(大)을 만드는 처소라고하여
그렇게 지은 것이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하여 대조전엔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관람료는 대인 3,000원/매주 월요일은 궁 휴무날입니다
관람 시간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고 보통 09시-오후 17시까지이다
비원은
서울의 종로 3가 창덕궁안에 있습니다.
돈화문이 정문인 창덕궁은 입구에서 규칙적으로 시간에 맞춰 관광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들어갈 수 있으며 궁내를 전부 인솔자의 안내를 받으며 관광하며
최종 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후문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별도의 개인 행동을 금하나 대열을 이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사진 촬영은 가능하고 연화당 앞에서 상당한 휴식 시간도 있습니다.
비원은 창덕궁 낙선재를 지나면 뒤로 돌아가 있는 창덕궁 뒤 뜰이라고 보면 됩니다.
비원은
창덕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갖추고 있는 궁궐의 뒷동산입니다
부용지,애련지,관람지,존덕지같은 연못을 만들고 옥류관에서 풍류을 즐겼던 곳이다
지금은 이곳에서 대인 1인당 3,000원 입장료가 따로 있어 불편하고 시간 맟추어 관람 한다
연경당
연경당은
사대부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연경당 앞 넓은 터에도 느티나무가 있어
아들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이곳에 자주 들어 쉬었다던
순조가 여름철이면 그 푸른 가지에 깃든 매미 소리에 세상시름과 더위를 씻었을 법하다
이 느티나무는 한때 중병에 걸려서 나무둥치의 절반을 에폭시
수지로 때우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아직도 굳세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연경당은
순조 때 효명세자의 청으로 지어졌는데
왕실에서 사대부의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서 지어진 건물이다
그래서 궁내에 있으면서도 단청도 칠하지 않아 고졸한 분위기가 그만이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당호지만 이 사대부 집을 통틀어 그냥 연경당이라고 부른다.
애련정
애련지/현재는 물을 뺀 상태의 모습이다
애련지는
애련이란"군자의 덕으로 상징되는 연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부용정
부용지와 주합루아름다운 풍경 모습
주합루는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짓도록 명했다
규장각은 개혁정치 의 상징이다
정조는 규장각에 실학자들이나 서얼출신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제일 큰 건물이 규장각 본관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래층이 바로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고
2층은 열람실로서 주합루라고 한다.
부용지
위로 정조대왕이 지은 주합루가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또한 연못 오른쪽에는 연못을 보며 쉬기에 딱좋은 영화당이 건너편에는 사정비각이 서 있다
이곳 부용지의 특징은 땅위에서 흐르는 물이 고인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영화당
영화당(앞뜰 춘당대에서 열리는 문무의 과거를 임금이 직접 주관 하기도 한곳임)
애련정
관람정
반도지라는 연못가에 있으며 이 정자는 합죽선으로 편 듯한 모양으로 되어
마루들이나 지붕에서도 평면형태에 따라 곡재를 사용한 우리나라 유일한 형태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언제 건축 되었는지 알수가 없으나
대한제국 말이나 일제 초에서 만들어진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한다
옥류천
바위에 새겨진 옥류천이란 글씨가 인조의 친필이랍니다
옥류천
이곳은 창덕궁 후원속에서 가장 깊은 계원이다
계류는 북악산의 동편 줄기의 하나인 용봉의 산록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산내와 어정을 파서 천수를 흐리게 하였다 한다
향나무/노송
이 향나무는 나이가 약700년 된 노송으로 나무 높이가 약 6m가 되고
가슴 높이 둘레가 약 4.3m 되고 나무 가지 줄기가 마치 용임 같은 형태로 진기한 모습이다
창덕궁은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동궐이라 불렸고,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고궁이며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과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
태종이 지은 이 건물은 고려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기에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지 않아 아무런 얽매임없이 동양적인 멋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타 소실되기도 했지만 다시 지어져 궁으로서
조선시대에 제일 많이 사용된 건물이기도 합니다.
창덕궁 (비원)
지난주 주말에 서울 모임에
찾았던 창덕궁,비원은 우리나라 옛 궁궐의 산실이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중 비교적 원형이 잘 보전되고
자연과의 조화가 가장 잘 이루어저있는 궁궐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읍니다.
앞으로도 잘 관리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 주었으면 한다
2010.6.26
창덕궁을 관람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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