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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장수의 양심

행복사 2010. 9. 1. 15:46

 

배추장수의 양심

주택가를 돌며

야채를 파는 이동 야채가게가 있었습니다.


“자, 싱싱한 배추 왔어요. 배추…싸요 싸!”
이 가게는 집 앞 골목에 배추, 무 같은 야채를 싣고 와서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추가 하도 싱싱해 보여
여섯 포기를 산 나는 배달을 부탁했습니다.
“동, 호수만 가르쳐 주세요. 갖다 드릴 테니까요 염려마시구요.”
“5동 415호요.”
나는 아무 의심 없이 동, 호수를 가르쳐 주고는
배추 값을 지불한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곧 갖다 주마 하던 배추장수는
저물녘이 되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마른하늘에서 난데없이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만 한 차례 퍼부었습니다.


비가 와서 늦으려니 하고 기다리던 나는
비가 그치고 밤이 되어도 배추장수가
오지 않자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휴, 그깟 돈 만 원에 양심을 팔다니… 어휴.”
“뜨네기 장사꾼을 믿은 당신이 잘못이지. 그냥 잃어버린 셈 쳐요.”
남편은 위로인지 책망인지 모를 소리로 내 심사를 건드렸고
나는 허탈해진 마음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은 볕이 좋아 빨래를 했습니다.
탈탈 털어서 베란다에 줄맞추어 널고 있던 점심 무렵이었습니다.


“딩동.”
“누구세요?”
“저 혹시 어제 배추 사신 적 있으세요?”
나는 얼른 문을 열었습니다.
대문 앞에는 땀에 절은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어제 그 배추장수였습니다.
나는 반가운 마음보다 책망하는 마음이 앞서 따지듯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네, 맞아요. 근데 왜 인제 오셨죠?”
배추장수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쪽지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동 호수를 적은 종이가 비에 젖어서…다 번지고 맨 끝에 5자만 남았거든요.”
그는 너무 놀라서 쳐다보는 내 표정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단지 안 5호란 5호는 다 돌아다니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그만…
아유 이거 죄송합니다.”
그는 고개까지 숙이며 내게 사과했습니다.

그는 숨박꼭질 같은 집 찾기에
정말 지친 듯 입술까지 부르터 있었습니다.
“어머나, 난 그런줄도 모르고 …….”
그는 점심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는 내 손을 뿌리치고
이제라도 장사를 나가야 한다며 돌아섰고,
나는 그런 그를 의심했던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