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다른 아버지들과 달랐습니다.
오른손 다섯 손가락이 한데 엉겨 붙어서 주먹을 쥔 것처럼 뭉툭했고,
목 부근에도 커다란 화상 흉터가 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무서워 나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려서 아버지께
안아 달라거나 업어 달라고 조른 기억이 없습니다.
가끔은 그러고도 싶었는데 아버지의 옷자락 끝에서
불쑥 나오는 오른손을 볼 때마다 고개를 돌려 버렸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행여 친구들이
아버지의 오른손을 볼까 봐 가슴을 졸였습니다.
그런 나를 보는 아버지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아버지도 남들처럼 자식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싶었을 텐데,
속으로 눈물만 삼키셨을 겁니다.
철이 들 무렵까지도
아버지께서 어떻게 손을 다치셨는지 몰랐습니다.
아니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어른이 돼서야 어머니께 그 이유를 여쭈어 봤으니,
나는 참으로 무심한 아들입니다.
피난 시절 어린 아버지는 등잔불을 갖고
놀다가 등유를 뒤집어썼답니다.
할아버지가 달려들어 온몸에 붙은 불을 껐고
아버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화마는 아버지의 고사리 같은 오른손을 엉겨 붙게 했고,
허리가 구부러질 만큼 가슴에 커다란 화상 자국을 남겼습니다.
아버지 나이 불과 열 살 남짓할 무렵이었습니다.
한순간의 실수로 평생 고통의 세월을 살아오신 아버지.
어쩌면 아버지는 이 못난 아들에게 더 큰 상처를 받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제야 아버지의 삶이 내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아버지는 청년이 되어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4남매를 두셨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께 “왜 아버지랑 결혼했어요?” 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좋아서 했냐? 억지로 했지”라고 대답하며 살며시 웃으셨죠.
아마도 동네 사람들은 천애 고아로 자라 남의 집에서 아기를 봐 주던
어머니를 아버지랑 서로 의지하면서 살라고 맺어 주었던가 봅니다.
어머니는 언젠가 “니 아버지가 호강은 시켜 주지 못해도
남들처럼 손찌검하거나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애인의 아내로 산다는 게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오른손을 보면서 고아로 남의 집
눈칫밥을 먹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릅니다.
성한 몸으로도 넘기 힘든 보릿고개를 한 손으로 넘으신 아버지,
한 손으로 논밭을 갈아 농사를 지어 오신 아버지.
그 세월 동안 아버지가 느끼셨을 생활의 무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옵니다.
아버지께서 젊어서 고생하신 만큼 4남매를
시집 장가 보낸 뒤에는 편안하게 사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막내딸을 시집보내기 무섭게 아버지는 넘어지며
목뼈를 다치는 바람에 하반신과 왼쪽 팔마저 마비 되고 말았습니다.
어찌 하늘은 이렇게도 공평하지 못할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행복한 분이십니다.
묵묵히 대소변을 받아 내는 사랑하는 아내가 곁에 있고,
나이가 꽉 찬 자식들 시집 장가 못 보낸 고향 사람들이
4남매 모두 출가시켰다고 아버지를 부러워하니까요.
얼마 전 아버지의 고향 친구 분을 만났습니다.
아저씨는 연세가 들면서 시력이 나빠져서 이젠 두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아저씨도, 다들 고생하신 만큼 행복하게 사셔야 하는데….”
내 말에 아저씨는 끝내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그래도 네 아버지는 고향산천을 볼 수 있잖아.”
농사철이면 논밭에서 호미랑 삽을 벗 삼고,
가을이면 산을 휘적휘적 올라 버섯이며 머루,
다래를 따다 주신 아버지.
만물이 소생하는 봄,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어 드리면서
당신께서 자유롭게 거닐던 고향 산길을 걷고 싶습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의 뭉툭한 오른손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고
아버지의 두 손을 꼭 잡아 드릴 수 있습니다.
필자 : 박창섭님 (가명)
출처 : 월간《좋은생각》 2007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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