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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군(백제 왕릉원)

행복사 2011. 7. 24. 11:34

 

종목 : 사적 제14호
명칭 : 부여능산리고분군(扶餘陵山里古墳群)
지정(등록)일 : 1963.01.21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 041-830-2512

 

부여능산리고분군 유적 모형 전시관

 

능산리 유적 모형전시관

 

이곳 전시실에는

능산리 유적에 관한 전시물들이 전시 되었고

전담 안내사가 있어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모형 무덤 전시관/무덤 내부는 아치형

 금동용봉봉래산향로. 국보 제287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

 

 

1호분 동하총

장방형현실과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현실과 길이 연도는 사면벽을 화강암과

편마암의 거대한 1매 판석을 사용하였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백제 의자왕 묘비,오른쪽은 아들 부여융 묘비


의자왕( 595/9년[1]~660년, 재위: 641년~660년)은

백제의 제31대 국왕이며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부여이다.

대개 의자왕의 ‘의자’는 시호라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의자왕의 휘이다

태자 때부터 아우들과 우애가 깊고 사려가 깊어 ‘해동증자’으로 칭송을 받았다

 

백제 의자왕 묘비

 

백제 30대 왕이 무왕인 서동과 그의 부인인 선화공주

서동과 선화공주 사이에 태어난 다음왕자가 31대 의자왕

태자 때부터 아우들과 우애가 깊고

사려가 깊어 ‘해동증자’으로 칭송을 받았다

 

의자왕 아들 부여융 묘비

 

부여가 멸망하여 의자왕과 함께 서안 당나라로 끌어가

그 곳에서 비참한 삶을 살다 운명을 한 비극의 왕자다

부여능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최근 무덤들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부여능산리 고분군 전경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1호분(동화총) 


1호분내부벽화

 

1호분 내부 벽화가 많이 훼손 되어

지금은 열쇠로 잠금 장치를 해 놓았는데

이곳은 모험을 만들어서 관람객들에게 공개 중이다

 

 

무덤은 맨 아래쪽 오른쪽부터 1호분,2호분,3호분

3호분 바로 윗쪽으로 시작하여 4호분,5호분,6호분

맨 위에 있는 무덤이 7호분(가장 위에 있는 묘)

 

1호분 내부벽화(모형에서 찍은 사진)

 

장방형현실과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일반인들에게  공개 된후에

청룡 벽화가 많이 휘손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모형을 만들어 공개하고 진짜 1호분은

열쇠로 잠금 장치하여 문화재국에서 보호 관리 중이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

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뒷산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앞산인 염창리산을 남쪽의 주작으로 삼았고,
묘지의 전방 약 200m 거리에 능산리천이 서류하는 남향의 왕실의 공동묘지이다

 

고분의 분구는 모두 원형봉토분이며,

크기는 대형·중형·소형의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대형인 전열의 3기는 분구의 직경이 약 25∼30m이고,
중형인 후열의 분구는 직경이 약 20∼25m이며,
최후의 1기는 분구의 직경이 20m 내외이다. 

 

 

1호분 동하총은 장방형현실과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현실과 길이 연도는 사면벽을 화강암과 편마암의 거대한 1매 판석을 사용하였다.
석실 바닥의 중앙부에 모전석을 사용하여 길이 238cm·너비 125cm·높이 17.5cm

규모의 관대를 만들었는데, 상면을 들고 내부를 보면,

당초에는 1인용 관대였으나 뒤에 양측으로 확장하여 2인용 관대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석실과 연도 사이는 너비 104cm·길이 63.5cm의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석문[문비석을 닫도록 하였다. 연도는 비교적 길고,
넓게 하였는데, 밖으로 갈수록 넓어져서 나팔형으로 되었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내연도·외연도로 구분하였는데,
내연도는 석실과 같은 1매의 판석으로 하고,

외연도는 돌을 쌓은 후 표면에 두텁게 회발이를 하였다.

연도 입구는 잡석을 쌓아 폐쇄하였다.
현실의 네 벽과 천정에는 벽화를 그렸다.
1매로 된 거대한 판석의 표면을 물갈이 하여 반질반질하게 하고,
그 표면에 바로 그림을 그렸다.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 백호, 북벽에 현무, 남벽에 주작,

천정에 연화문과 유운문등을 각각 그렸다.

이 사신도의 양식을 송산리 6호분으로 연결되며,

멀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추축된다.

석실전장은 759cm이고,
현실 길이 326cm·너비 151cm·벽고(천정고) 194cm이며,
연도 길이 370cm·너비 143cm·천정고 168cm의 규모이다.

 

 
2호분중하총은 장방형의 석실과 비교적 긴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천정형식은 터널형이며, 벽체는 긴 장대석으로 축조하였다.
마치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의 형식을 재료만 벽돌에서 장대석으로 바꾸어 놓은 형식이다.
석실전장은 672cm이고, 현실 길이 349cm·너비 215.1cm·벽고 130.4cm·천정고 234.3cm이며,
연도 길이 290cm·너비 112.2㎝·천정고 126.1cm이다.

3호분서하총은 장방형석실과 비교적 짧은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천정의 형식은 평사천정이며, 벽체는 거대한 판석 1매로 구성하였다.

이 형식은 7세기경 부여지방에서 크게 유행하여 주류를 이루었다.

석실전장은 471.6cm이고, 현실 길이 314cm·너비 136cm·벽고 131cm·천정고 165cm이며,
연도 길이 131cm·너비 122cm·천정고 131cm이다.

 

 
4호분 서상총·5호분중상총·

6호분 동상총 등은 판석조의 단실묘이며,

천정형식은 평사천정으로 이루어졌다.

7호분장방형석실과 짧은 연도로 된 단실묘이며,
벽체와 천정은 각면 4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다.
석실전장은 355cm이고, 현실 길이 139cm·너비 62.5cm·벽고 100cm·

천장고 145cm이며, 연도 길이 55cm·너비 90cm·천장고 100cm이다.


능산리 고분군은 일찍이 도굴되어 조사시에는 약간의 유물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2호분에서 칠기편 금동원두정,
5호분에서 두개골파편 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
금동화형좌금구 등만이 발견되었고,
분구 외에서 토기기대·호 등이 수습되었다.

능산리 고분군은 연대순으로 보면 중하총·동하총·서하총 순으로 축조되었다.
중하총을 제일 이른 시기로 보는 이유는 터널형식은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과 6호분의 형식과 같고,

단지 재료만 전에서 돌로 대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분 주인공의 추정은,
중하총은 웅진에서 즉위하여 사비에서 사망한 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다음 동하총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으로 추정하며,
서하총 이하 평사천정형식은 사비시대 중기 이후에

유행한 형식이므로 각각 시기에 맞는 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고분군의 서쪽 200m 거리에서 능사,(원찰터가 발굴되었고,

그곳에서 출토된 금동용봉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의 출토는
능산리 고분군이 왕실묘지라는 것을 재확인시켜주었다.

 

2011.7.23

능산리 고분군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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