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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가출했습니다 / 雪花 박현희

행복사 2013. 1. 24. 21:31

 


아내가 가출했습니다 / 雪花 박현희

 

 

아내가 가출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내가 가출했습니다.

 

나만 홀로 버려두고 도망갈까 봐

아내 모르게 신발을 꼭꼭 숨겨두었더니

엄동설한 눈발 사나운 날에 옷가지 하나만 달랑 걸치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도망치듯 가출했습니다.

 

아니 아내가 가출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아내를 내몰았습니다.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잘못된 내 방식대로만 사랑하려 했던

나의 지나친 소유욕과 집착이

엄동설한 사나운 눈발 속으로 아내를 내몰았습니다.

 

아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는데

평생 업고 다녀도 모자랄 만큼 고맙기 그지없는 착하디착한 아내인데

계속되는 나의 구타와 폭력을 견디다 못해

엄동설한 눈발 사나운 날에 맨발로 가출했습니다.

 

못난 나를 만나 평생 마음고생만 시켰는데

매서운 한파에 사나운 눈발 속으로 꽁꽁 언 손발을 동동거리며

나를 피해 도망친 아내를 생각하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아내에게 있어 정말로 무서운 것은

땡전 한 푼 없이 빈손인 채 엄동설한 맨발의 가출보다도

나의 구타와 폭력이 훨씬 더 진저리치게 무서웠을 것입니다.

 

모두가 졸렬하기 이를 데 없는 못난 내 탓입니다.

난 정말로 잔인한 폭군의 가장이었습니다.

내 방식대로만 사랑하려 했지

가족과 아내의 입장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소유와 집착이 아닌 배려와 존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가정 폭력은 살인에 버금가는 범죄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아내를 보내주어야겠습니다.

나의 헛된 이기심과 집착에서 아내를 그만 놓아주어야겠습니다.

그것으로나마 아내에게 속죄할 수 있다면

맘 편히 살 수 있도록 아내의 행복을 위해 보내주어야겠습니다.

 

용서를 빈다고 용서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내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습니다.

부디 못난 나를 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